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2020년

캐나다에서 일하면서 지낸지 어느덧 만 3년을 막 넘겼다.

가을에 한국에 한 번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게 되었다.

 

연초 각국의 뉴스들을 보며 당혹감을 느끼거나 혹은 분노하다가, 깊은 통찰 없이 자극적인 숫자만을 나열하는 기사들에 내 모든 감정이 너무 압도되는 것을 느껴서 일부러 찾아보는 걸 그만두었다. 그 후로는 모든 소식들에 좀 거리를 두고 반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친구들, 가족들과 연락하면 얼른 괜찮아지면 좋겠다라는 말 외에는 딱히 뭐라 할 수가 없다.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행정적인 결정은 내리지 못하고 편향적인 시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 분석과 감염자들에게 낙인 도장을 찍는다거나 판데믹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부들의 행보에 눈살이 찌푸려질 뿐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코로나 여파에도 직장을 잃지 않고 3월 초반부터 쭉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다.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도, 가장 가깝게는 남자친구까지도 제대로 된 풀타임 프로젝트가 없어져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일부 사람들로부터는 무려 감사해야 한다는 말도 들으면서 일을 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수 개월을 지내다 보니 점점 일이 내 생활을 잡아먹는 듯한 느낌이 든다. 메신저로만 이루어지는 의사 소통이 효율을 점점 떨어뜨리고, 주어진 태스크를 제 시간안에 수행하지 못하거나 진행하는 데 있어서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을 때 해결 의지도 바닥이고 스스로가 너무 보잘 것 없이 느껴진다.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 안에서 다 풀게 된다. 사소한 것에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는 일도 너무 잦았다.

 

애초에 breakdown이 전혀 되지 않은 태스크가 문제인데, 이걸 팀과 매니지먼트에 어떻게 전달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매니지먼트에 큰 인사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게 올해 초부터인데 바로 3주 전까지도 새로운 매니저들이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문제들이 눈덩이 불어나듯 그 위에 쌓였다. 지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닌데, 일개 사원인 내 의견이 즉각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게 내게는 버겁게 돌아온다.

 

그래도 이때까지 일해 오면서 이 정도로 무기력함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이게 단지 내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코로나 사태와 재택근무가 알게 모르게 내게 영향을 미쳐서인지 알 수 없다. 외부 상황을 탓하면 마치 책임을 회피하는 느낌이라 좀 별로지만, 밑도 끝도 없이 좌절감을 느끼면서 화를 쏟아내고 나면 그 감정들이 과연 내 것인지 의문마저 든다. 나만큼 혹은 나보다도 힘들 사람은 옆에 있는 남자친구인데 막상 그런 내 모습에 겁이 난다는 말을 들으면 미안하고 속상하면서도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막막해서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와 남자친구의 본국으로 함께 돌아가고자 하는 계획에 맞춰서, 조만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이 아닌 삶을 우선으로 하는 선택을 하고자 한다. 무직 상태로 이사하기 :P

원래는 지금 회사에서 트랜스퍼 신청을 하려고 했지만 모든 게 불확실하고 연기되는 코로나 상황에 내가 원하는 것과 내 선택을 모두 억누르고 무작정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아무런 보장도 보험(?)도 없이 나를 내던진다는 게 사실 많이 걱정되고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수많은 다툼과 의견 조율에 뒤이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된다. 해결해야 할 정말 많은 일들이 남아 있지만 몇달 째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황을 벗어나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여볼 수 있다는 상황 자체만으로 조금 힘이 나는 것 같다.

 

사실 코로나바이러스가 없었더라도, 삶이란 건 원래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막상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걸 잘 모른채로 꾸역꾸역 앞만 보며 달려왔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계획에 크게 반하는 일도 딱히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걸 모르고 살다가 지금, 멈춰버린 이 세상 덕분에 방향도 모르고 불어나던 내 인생의 가속도 없어진 게 내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어쩌면 이 2020년 덕분에 비로소 본연의 인간다운 속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